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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호

[제작현장 비하인드]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을 품은 연극, <영지>를 만든 모든 것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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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가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 시간은 공연 한 시간 전, 객석 계단에 앉아 아무도 없는 텅 빈 무대를 바라볼 때였다. 마치 사람이 모두 나간 빈집에 창문으로 햇빛만이 쏟아지는 듯한 시간. 그렇게 방주인의 손때가 가득 묻은 공간을 오롯이 향유하며 나는 11살 영지의 방을 곧잘 구경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지가 모아온 괴상한 오브제들에 눈이 갔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쓰는 물건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말 영지만의 감수성으로 가득 찬 오브제들이어서 그랬다. 연필깎이에는 공룡 팔다리를 붙이고, 인형들의 팔다리를 마구 섞어 놓고(예를 들어 영지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인 아기 인형의 한쪽 다리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앞 다리다), 버려진 문에서 떼어 온 문고리로 가득 찬 유리병과 우산으로 만든 해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방. 이렇듯 각양각색의 오브제들과 함께한 공연이라 그런지 공연을 올리는 동안 오브제에 걸친 일화도 많았다. 그중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을 나누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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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팔과 다리를 찾아서]

 영지가 소희에게 ‘팔 잘린 인형과 목 없는 인형’ 이야기를 해줄 때 쓰는 관절 분리 인형들은 오브제 특성상 팔다리가 곧잘 사라졌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면 팔과 다리를 가장 먼저 찾아두어야 했는데, 자주 예상 밖의 장소에서 발견되곤 했다. 팔 한쪽이 소파 틈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 적도 있었고(다행히 이날은 테스트용으로 영상을 촬영했던 터라 행방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영지가 팔을 뽑아 소희에게 던질 때 소희의 무릎에 튕겨 나간 팔이 소파 틈 사이로 쏙 다이빙하는 것이 생생히 녹화되었던 것이다), 다리 한쪽은 카펫 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심지어 한 번은 인형 머리가 달린 연필을 꽂아두는 연필 통 속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아무리 오브제 특성상 분리가 잘 된다 해도 몇몇 장소들은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간 건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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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렁이 젤리는 탈출하고 싶어]

 무대의 잔디밭 위에는 젤리와 사탕, 쫀드기와 마시멜로가 담긴 과자 통이 있다. 2막에서 주민들과 아이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반상회를 할 때 사용하는데, 무대 팀의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그중 지렁이 젤리는 마치 과자 통에서 탈출하려는 듯 입구에 몸을 반쯤 걸친 모습으로 프리셋(공연 중 사용 목적에 맞추어 소품, 의상 등을 제자리에 세팅하는 일) 됐다. 처음에는 한두마리로 프리셋 됐던 지렁이들이 나중에는 8마리로까지 늘어났는데, 이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공연진들은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공연 전 오며 가며 사진을 찍었다.
 특히 관객 중 어린 관객들은 이 지렁이 젤리에 큰 흥미를 보였는데, 한 초등학생 관객들은 영지에게 허락을 구한 뒤 지렁이 젤리를 먹어보고는 ‘맛이 좋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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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과의 전쟁]

 털 선생이 쓰는 가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털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특히 두꺼운 털 말고도 실밥처럼 얇은 털들이 사이사이를 메꾸고 있어 덕분에 풍성한 외관이 완성되었는데, 다만 실밥이 배우의 얼굴(그중에서도 특히 콧구멍)을 간지럽힌다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그래서 무대 팀은 매 공연 전 족집게로 길게 튀어나온 실밥들을 정리했는데, 그렇게 가면에서 떨어져 나온 실밥들을 매일 모으니 나중엔 작은 ‘공’만 한 크기로까지 커졌다.
 나중에 이를 발견한 의상팀에서 이 실밥 뭉치를 재활용해 털 선생의 옷에 털로 로고를 수놓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나, 아쉽게도 실제 진행되지는 않았다.


"연습기간 포함 약 3달 동안 오브제와 함께 동고동락해서일까?
나는 오브제에 영혼이 들어있다는 조금은 유치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마치 도깨비처럼 말이다. 전래동화 속 도깨비들은 낡은 빗자루같이 사람들이 쓰는 오래된 물건으로 둔갑했었다고 전해진다. 영지가 모아온 물건들도 비슷하다. 다만 차이는 사람들이 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것. 망가져서 버려지고, 또는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멀리하게 된 것들. 너무나도 쉽게 우리의 삶에서 밀려난 것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것들을 영지는 애정을 담고 손수 하나하나 모아 자신의 방으로 가져왔다. 바로 그 순간, 이 물건들에 영혼이 깃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영혼들은 필시 영지 내면의 여러 모습을 하나씩 닮았을 것이다. 엉뚱하면서 유쾌하고, 괴상하지만 흥미롭고, 가끔은 버거울 정도로 천방지축이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영혼을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어두워진 극장을 나설 때면 나는 영지와 버려진 인형들이 함께 뛰노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곧 내 마음도 몽글몽글 작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영지>에는 정말 많은 오브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오브제는 단순히 공연을 위한 장치를 넘어 그 하나하나가 뚜렷한 색깔을 갖고 2023 <영지>를 다채롭게 물들여 주었다. 영지는 이 물감들로 세상이 숨긴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 어떤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영지만의 방식으로, 알록달록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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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오브제와 더불어 2023년 소극장판에서의 <영지>가 다채로운 빛깔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함께한 공연진의 노고 덕분이었다. 정말 많은 공연진이 함께했고, 극장에서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한 예로 자막/영상팀은 완벽한 타이밍에 자막과 영상을 틀기 위해 항상 공연 전 배우 호흡에 맞춰 큐(조명, 음향, 자막, 영상 등이 공연에 들어가는 포인트) 연습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엔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모든 연기와 리듬을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다. 한 스태프는 영지가 공터에서 열심히 찾는 ‘불이 안 나오는’ 라이터를 만들기 위해 여분의 다 쓴 라이터를 몇 개 만들어야 했는데, 흡연자가 아니었기에 항상 쉬는 시간마다 밖으로 나가 라이터를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의도치 않은 불멍의 시간을 가졌다. 또 다른 스태프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마당에서 관객들을 만나야 하는 영지를 위해 그날의 무드(mood)에 맞는 매번 새로운 우산을 골라왔는데, 덕분에 비가 오는 날이면 오늘은 영지가 어떤 우산을 들지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멋진 팀워크가 쌓인 덕분인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스태프와 배우 간에 자연스럽게 ‘신호’가 된 것들도 많았다. 무대 뒤에서 청소기 소리가 들리면 곧 무대를 청소할 것이란 뜻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무대에서 개인 연습을 하던 배우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또 스피커에서 ‘치직-‘ 하는 테스트용 소리가 들릴 때면 곧 마이크와 악기 테스트를 한다는 신호였는데, 6대의 스피커에서 ‘치직-‘ 하는 소리가 총 6번 들리고 나면 어느새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와 대기해 있곤 했다.

 이 모든 것들은 어찌 보면 공연 준비를 위한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누군가의 애정과 노력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2023년 소극장판에서의 공연이 끝난 지 한 달을 향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공연진들과 함께했던 이런 평범한 일상들이 가끔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내 생각보다도 내가 훨씬, 이 공연을 좋아했음을 깨닫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공연에 함께한 모든 요소, 모든 사람 덕분에 2023 <영지>가 완성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2023 <영지>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고, 또 이 이야기가 지금 - 현시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공유하는 멋진 공연진과 관객을 만난 덕분이었다. 조연출로 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소극장판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는 아쉬움도 잠시. 다행히 <영지>는 앞으로 몇 차례 더 관객들을 만날 기회가 남아있다. 남은 두 번의 지방공연도 무사히 올라가기를 바라며, 우리에게 ‘내일은 또 다르고 모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영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필자 소개]
이해인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좋아 글을 쓰고, 연극을 합니다. 무대 위로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면 이내 내 몸을 가득히 채워버리는 뜨거운 무언가 - 그 뜨거운 무언가를 통해 관객과 연극을 만든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2023 <영지>의 조연출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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