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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아래의 맥베스> 아침에 눈 뜰 때 이미 저무는 저 태양을 바라보며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3

    조회 1993


 군대가던 때를 떠올려볼까? 머리를 빡빡 밀고 지옥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어 논산으로
간다. 대한민국이 내게 무엇을 해줬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빠르게 닳아가
는 립스틱 같은 젊음을 신성(神聖)한 국방(國防)의 의무(義務)’라는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린다. 풀숲을 뒹군다. 진흙탕을 기어간다. 어느새 오줌 싸고 똥 싸는 것 까지 이래
라 저래라 간섭이다. 머리가 아찔해진다. 내가 왜 이 개고생을 하고 있나. 비로소 근원
적 물음에 다다랐을 때, 그 대답의 실효성(實效性)은 이미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후였
.
 분명히 다른 선택은 있었다. 이민을 간다든지, 아니면 누구처럼 생니라도 뽑든지.
지만 그게 참 맘처럼 쉽지가 않아서, 그게 참 말처럼 되지가 않아서, 울면서 겨자를 입
안 가득 삼켰어야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어쩔 수 없는선택, 이 불가항력(不可抗力)이 빚어낸 참혹한 비극을 들
여다 보자.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동원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일부는 전
쟁 종료 후 포로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살아남
은 자들은 일본에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조차 받지 못 하고, 조국에서는 친일파
로 몰려 버림 받는다. 작가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비극적
운명에 휘말렸던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고전 맥베스(Macbeth)에 비유하
고 있다.
 연극은 특별한 줄거리 없이 주인공 <김춘길>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범
으로 전락한 당시 포로감시원들의 열악한 수감 생활상과 저마다의 사연들을 보여준
. 고향에 홀어머니를 둔 여리디 여린 소년 <이문평>, 탄원서를 기다리다 끝내 비극
으로 치닫는 <박남성>처럼 등장인물 각자의 사연들은 구구절절하고 딱하다. 하지만
남의 염병(染病)이 내 고뿔만 못 하다고 그들의 절규(絶叫)를 그토록 오랫동안 보고 듣
는 것은 지루하게 느껴진다. 비스킷 두 조각과 차 한 모금이 어느 정도의 배고픔인지
는 헤아릴 길이 없고 보릿고개에 나무껍질 끓여 먹었다는 어르신들의 전래동화처럼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굳이 이 연극이 아니더라도 다른 매체(媒體)를 통해 익히 들어
온 얘기들이지 않은가. 연극은 적정선을 지키지 못 하고,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
에도 관객의 가슴에 실감나는 카운터펀치(Counterpunch) 한방을 날리지 못 한 채 표
(漂流)한다.
     
 <야마가타 타케오>의 존재는 실망스러울 정도다. 그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 포로를 학
대했다는 여느 수감자들과 달리 상부의 지시를 받기도, 하부에 지시를 내리기도 하는
수동성(受動性)과 능동성(能動性)을 모두 가진 독특한 위치를 점()한 인물이다. 게다
<김춘길>의 맹비난과 살해위협에도 마치 넋이 나간 정신병자인양 말 한마디 없이
무대를 뱅글뱅글 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듯이 말이다. 분명 이 단조로움 속에
최후의 한방을 터뜨려줄 적임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단지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시시한 수감자로 쪼그라든다.

 작가는 조선인 전범자 문제를 가감 없이, 치우침 없이 그려내려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관객은 <오카다 스스무>가 아니다. 무려 70년이라는 시대적, 시간적, 정서적 괴
리감(乖離感)<오카다 스스무>처럼 단순히 불타는 정의감(正義感)과 동의할 수 없
는 호기심(好奇心)으로 메울만한 평면적인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저 괴리감을 작가
가 직접 메워 관객들의 살갗을 자극할 체감온도(體感溫度)로 만들어주지 않는 이상 배
우들이 백날 무대에서 떠들어본들 관객들은 그래, 그때는 그랬나보다. 힘들었겠
.’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김춘길>이 노인의 모습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수감소로 돌아가 동료들과 섞이는 모습은 재밌기는 하지만 거북하다.

 무대에 철도를 옮겨놓은 점은 독특하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라는 제목답게 낮 장면
에는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느낌이 들도록 조명을 더 집중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
는다. 스크린에 나오는 반딧불은 사뭇 몽환적이다.
 <소다 히로시><미야지야 마사야>의 연기는 일품이다. <소다 히로시>가 전화를 받
을 때마다 함께 짜증이 치밀고 <미야지야 마사야>가 밀린 봉급을 얘기할 때는 절박
함이 묻어난다. 12역을 한 <김춘길>의 환복노고(換服勞苦)도 알아주어야 할 것이
. 무대에 오른 배우들의 연기력은 한결같이 좋다.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기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아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
참히 파괴당한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한들, 틀렸다한들 그것은 이제 중
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를 비추던 적도(赤道)의 태양(太陽)은 이미 저물
었기 때문이다.
20100912_적도아래 포스터최종.jpg
적도 아래의 맥베스

- 2010.10.02 ~ 2010.10.14

- 평일 7시 30분 / 토요일,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

- 8세 이상 관람가 // A석 안내- 무대 장치를 넓게 사용하므로, 객석 3층의 경우 무대 일부가 충분히 보이지 않을 수 있사오니 예매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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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탈퇴회원)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시작한 서론부분이 참 마음에 드는것 같습니다. 피해갈수 없었던 우리조국의 고통을 생각해보니 제 마음이 아파집니다.

    2010.10.15 10:29

  • (탈퇴회원)

    공연을 보면서 작성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어느정도의 부족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우들의 열정은 대단하였으나 연출면에 조금 부족한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극 자체로 볼땐 오늘날 꼭 필요했던 연극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연극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로에서는 주로 희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살아가면서 역사속에 묻혀져 가고 망각되어 가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극이었습니다. 어떠한 집단에서도 버림받은채 살아간 그들의 심정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0.10.14 20:56

  • (탈퇴회원)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군 생활 생각이 많이 나 기분은 썩 좋진 않았지만 배우분들의 연기에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오랜시간 이었지만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을 본 사람들 중에 저처럼 어떠한 형태로든 여운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성공한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2010.10.14 18:11

  • (탈퇴회원)

    내용을 잘 몰라서 내용에 대해 언급 하지 않지만, 지난 일을 이렇게 극으로 보는것은 참 마음 아픈것 같아요. 윗 분의 끝부분 말처럼 지난 일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지만 그 당시에는 알기가 쉽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악행을 하고.... 그런 일을 지금 극으로 만들어서 보면 그 일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서 보게되죠. 따라서 우리가 지난 일에 대해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악감정을 갖게되니까 마음 아픈 일이라고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2010.10.13 22:52

  • (탈퇴회원)

    저도 보면서 배우분들 연기는 정말 소름끼치도록 잘하셨지만 종전후의 65년이라는 세월이 지닌 괴리감을 작품이 어느정도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정말 조선과 일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였을 그들의 입장을 어느정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2010.10.13 2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