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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유산> '위대한 유산' 읽기 vs '위대한 유산' 보기
  • 작성자 이*도

    등록일 2014.12.19

    조회 1604

연극 '위대한 유산'을 두 가지 측면에서 들여다본다. 하나는 원작소설 자체에 대해서, 또 하나는 연극화를 위한 연출에 대해서.

 

원작에 있어서: 우리는 욕망한다. 그런데 그 욕망이 진짜 우리의 욕망일까? 원작소설이 던지는 가장 큰 물음은 이것이다. 핍은 신사가 되길 원한다. 그건 핍이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핍은 왜 원하는 걸까. 에스텔라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이유기는 하다. 그러나 핍이 신사가 되길 원하는 건 핍뿐만이 아니다. 그를 신사로 만들어,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하는 멕위치. 이 둘의 관계가 밝혀지는 대목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고, 또한 작품 제목의 숨은 의미를 밝혀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인 '위대한' 유산이라는 말에서,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다소 반어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그 유산이 범죄자 멕위치의 검은 돈을 출처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핍과 멕위치의 관계는 에스텔라와 미스 헴프셔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욕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그들만의 욕망이 아니다. 한 사람의 욕망에 실은 그 사회와 문화와 시대 모두가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이 시대가 강요한 욕망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비극적인 것은 마치 신사의 본질보다는 신사라는 껍데기를 추구하며 점점 속물이 되어가는 핍처럼, 우리에게 주입된 욕망이 우리를 우리가 원치 않았던 곳으로 데려가곤 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온다면 너무 비약인가? 그러나 지금 이곳,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위대한 유산'이 여전히 문제적이란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 거다.

 

연출에 있어서: 위와 같은 측면 때문에, 우리의 '위대한 유산' 읽기는 가볍지 못하다. 자꾸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런 측면에 이 연극의 연출 또한 기여한다. 이 연극은 '회환'의 연극이다. 주인공 핍의 시점을 통해, 지금 성인이 된 핍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부터, 성인이 된 핍의 의식 속에서 반복 또 반복적으로 어린 시절의 핍이 등장하여 무대 위해서 몇 번의 재연이 펼쳐지는 것까지. 이 뿐만이 아니다. 연극무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쇠락한 셰티스 하우스의 전경은 이 작품 전반에, 핍의 결핍되고 우울했던 유년기의 인상을 계속 남긴다. 또한 마치 트라우마와 같은 강박으로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핍, 그의 무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삭막한 풍경 자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의 초반부에서 등장이나 퇴장도 없이 쭉 무대 위에서 앉아서 배우들을 지켜보고 있던 미스 헴프셔, 그녀의 존재감은 핍과 에스텔라의 의식 속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극 진행에 따라 그녀가 무대 위에서 사라짐에도, 그 대신 무대배경에 셰티스 하우스는 남아있음으로 해서, 미스 헴프셔와 셰티스 하우스는 서로가 서로를 상징하게 된다. 몰락하여 텅 빈 채 고독하게 낡아가는 셰티스 하우스, 바로 그 저택 자체가 미스 헴프셔인 것이다. 연출이라는 형식에 원작소설의 내용이 이와 같이 반영된 것이다.

 

연극 '위대한 유산'에 칭찬과 비난을 하게 된다면 그 둘은 모두, '회환'이라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담아낸 연출의도가 성공적이었느냐 아니냐에 의해 갈리게 될 것이다. 이건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왜냐면 이 연극은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므로, 극장을 나서며 관객들이 가져가야할 몫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말 특유의 맹목적인 낙관의 분위기에 이 연극의 의미가 가려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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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 2014.12.03 ~ 2014.12.28

- 평일 19시30분ㅣ주말·공휴일 15시ㅣ
*12.17(수) 오전11시ㅣ12.27(토)15시,19시30분ㅣ
화요일 공연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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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13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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