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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아래의 맥베스> 다듬지 않은 보석같아 예술을 갈망하다
  • 작성자 (*퇴회원)

    등록일 2010.10.16

    조회 1844

 

다듬지 않은 보석같아 예술을 갈망하다 '적도아래의 맥베스'




전쟁이야기는 끝나고, 번외편이 남아있었다

이 연극이 재미없는 시대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유는 시대배경 탓이다.

보통 시대극이라면 전쟁의 발발이나 전장 속에서의 이야기들을 다루기 마련이다. 누가 죽더라도 그 긴장은 연속되고 관객들은 감동을 한다거나, 평화를 기약한다. 이 연극은 종전 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긴장과 공포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시대. 하지만 이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실존역사를 전하는 연극이니,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들을 살려낼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당시 우리 선조들은 뭘 했나? 일본이 저들을 방치했을까? 연합군의 행동이 바람직했을까?라는 의문점이 들기 시작한다.

당시 배경은 태평양 전쟁 종반과 그 후를 다루고 있다. 일본은 한국 청년들을 데려다가 철도공사 현장 군속 신분으로 파견시켰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한국 청년들에게 거짓으로 군속 신분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장차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미리 차단할 목적으로 한국 청년들로 하여금 연합군 포로들과 직접 부딪치게 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등 뒤에서 총으로 통제했었다. 결국 한국 청년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불가항력 상태에서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이는 마치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들을 때리기 위해 손에 들고 휘두른 몽둥이와 같이 ‘의사 없는 도구’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한국 청년들의 행동은 무죄로 선고됐어야 옳았다. 하지만 연합군 검찰관이나 재판관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오직 유죄라고 생각하는지 무죄라고 생각하는지만 다그쳐 물었다. 일본군은 교수대에 올라서서 ‘천황 만세’를 부르고 교수대로 걸어가면서 군가를 부르다가 죽는데, 그들에게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한국 청년들의 죽음은 개죽음보다 못한 수치스럽고 억울한 것이라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

종전 당시 B·C급 전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국인이었던 ‘홍사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역시 연합군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일본 육사 동기생들이나마 그들을 중심으로 ’홍사익 구명 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각 언론사에서도 이러한 구명운동이 진행되었었고, 일본 일부 극우세력들도 형량이 과도하다는 여론이 있었다고는 한다.

영화나 소설로 알려진 ‘콰이강의 다리’도 그 당시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인 포로감시병이 등장한다. 이들을 상당히 험악하게 생긴 것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킹랫‘이라는 영화의 원작 또한 조선인 포로감시병을 소개하는데 상당히 비열하고 교활하며 일본군보다 더 잔인한 것으로 나온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고 그들을 다시 살려낼 순 없다. 단지 사실을 알리는 것만이 이들에 대한 넋을 기릴 방법이다. 그러한 이들을 이 연극에서 진실을 전하고 있었고, 충분한 역사 컨텐츠로 소화해낼 수 있었다.

 

웃다 울다 분노하는 감정폭발물로 뒤덮인 지뢰밭을 건넜다

심한 감정기복 앞에 불편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관객의 호흡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만큼 심했다. 사람이 저렇게 되어야 했을까? 스탠포드에서 이루어진 죄수와 간수 실험같은 유명한 일화나 <엑스페리먼트>의 죄수들처럼 연기자들은 그야말로 죄수가 되어 버려야 했다. 웃었다가도 울고, 얼마 안돼서 분노하고, 이 모든 것이 한 장면에서 이뤄져버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짧은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이 실존 인물들의 느꼈던 감정들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희망0%.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들의 죽음선고를 받고 할 수 있는 일들

- 여흥, 담배, 매운 고추, 눈물

희망이 있든 없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형선고는 그런 사정을 받아들일 여지도 없이 내려졌다. 오늘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연합군의 잘못도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여지없이 토하게 만든다.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연극에서 아쉽게도 설득력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죽기 직전 감정의 기복은 더욱 심해졌다. 죽기 직전에 가지게 되는 너무 많은 방대한 생각과 감정을 전해야 했다.

이들은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 여흥을 가질뿐 아니라, 매운 고추를 먹고 혀끝에서 느끼는 통각을 통해 감각이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또, 웃고 울다 나오게 되는 흡연연기는 죽기 직전을 잘 방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전설로 참회하는 결말

이 연극에서는 죽은 영혼을 기르며 반딧불을 보여주고 마지막을 메운다.

반딧불이 전설은 동아시아 일대에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일본 중국을 비롯해서 우리나라도 반딧불이 전설이 있다. 서로 다른 얘기를 품고 있지만 젊은 청년이 한을 품고 저승을 못가고 이승에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전설의 경우에는 구로헤이라는 악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살인전범으로 생매장을 당하자, 아들이 같이 묻어달라고 하게 되고, 무고하게 죽은 그 아들의 넋이 반딧불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나 중국보단 일본전설에 가까운 내용이다. 화자들도 일본인이고, 그들의 방식으로 참회를 하며 결말을 맺었다.

 

한국에서 연극으로 진실을 파헤치다

‘적도아래의 맥베스’는 누군가는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길 바라는 의미로도 하나의 작품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왜 연극이어야 했고, 한국인들이 봐주어야 했을까?

그들 후손이 배불려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사과를 한다고 해서 남을 것도 없다.

고통과 애환을 공유하고, 단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남는 거라면 남는 거겠지만 이 시대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이 무엇보다 크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앞에서 나왔듯이 하나의 역사 컨텐츠로 손색없는 소재였다. 어느정도 제일교포나 당시 시대에 대한 인식이 다양하게 인식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박치기‘나 드라마 ’경성스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때까지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을 중점으로 소개하려는 측면을 벗어나서, 진지함과 심각한 리얼스토리에서 벗어나 좀 더 예술을 담아내는 것도 좋고 잘 다듬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결하고 순귀할수록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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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아래의 맥베스

- 2010.10.02 ~ 2010.10.14

- 평일 7시 30분 / 토요일, 일요일 3시 (월요일 공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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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세 이상 관람가 // A석 안내- 무대 장치를 넓게 사용하므로, 객석 3층의 경우 무대 일부가 충분히 보이지 않을 수 있사오니 예매 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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