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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6월

[어린이청소년극하는 사람들]

청소년의 감정들. 하나.

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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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할 땐, 왠지 모르게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청소년 시절 언제나 내 몸 속 구석구석 가득 차올라 있어 굳이 관심 갖지 않았던 그 감정들, 하지만 이젠 문득 그리워져 오래된 사진첩을 보듯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그런. 그런 감정들을 내가 드문드문 그리워하곤 하는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두근거림과 두려움 사이 : <귀를 기울이면>(1995)의 시즈쿠

즐거운 두려움이 있다. 나의 한계가 드러날 때까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마주하고 싶은 두려움. 그런 두려움 앞에선 심장이 미칠 듯 두근거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바로 그때, 그 두려움에 기꺼이 달려들게 된다면 그건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 순간의 두근거림과, 함께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계속 느껴보고 싶어서일까?

시즈쿠 세이지는 바이콜린 잘 켜던데? 전공도 할 거야?
세이지 나만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아. 연주가보다는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고 싶어.
    (중략)
시즈쿠 부러워. 벌써 미래를 설계했구나. 나는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어.
세이지 나도 아직 확실하게 간다고 정해진 건 아냐. 매일 부모님하고 싸우기만 해. 간다고 해도 진짜 재능이 있는지 여부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니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3학년 시즈쿠는 책 뒤편의 도서카드에서 매번 자신보다 먼저 그 책을 빌려갔던 세이지란 이름을 발견한다. 그 이후 시즈쿠는 학교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면서 평소 꼭 보고 싶었던 책들을 들쳐보며 뒤편에 항상 적혀 있는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두근거림과 함께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책을 많이 읽는 걸까?’ 이후 우연한 계기로 둘은 가까워지고, 시즈쿠는 세이지가 매일같이 바이올린을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재능을 시험하기 위해 1년간 학교를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때 시즈쿠는 자신이 느낀 이상한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이지의 저 단호함은 왜 나를 이렇게 두렵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세이지 앞에서 느끼는 두근거림과 두려움 사이에서 시즈쿠는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날 밤부터 작가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시즈쿠 저… 지금 여기서 읽어주실 수 있으세요…? 몇 시간이든 기다릴게요.
할아버지 하지만 어렵게 쓴 작품일 텐데,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고 싶다만…
시즈쿠 재미없으시면 안 읽으셔도 괜찮아요. 아니,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가슴이 떨려서 도저히…
할아버지 그래 알았다. 지금 네 앞에서 읽어보마.
(중략)
시즈쿠 시즈쿠 양, 다 읽었다. 고맙구나. 아주 재밌었어.
시즈쿠 아뇨!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쓰고 싶은 것들이 뒤죽박죽이에요! 뒷부분은 영망이고요! 저도 알고 있는 걸요!
할아버지 그래, 거칠고 솔직하고 미완성이더구나. 세이지의 바이올린 같았어. 시즈쿠가 네 안에서 끌어올린 원석을 이 할애비는 똑똑히 봤단다. 아주 잘 썼더구나. 멋진 소녀 작가야. 허둥댈 거 없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연마하거라.

시즈쿠, 애써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린다. 한동안 서럽게 운다.

시즈쿠 저는… 저는… 쓰고 나서 깨달았어요. 쓰고 싶은 마음만으로 안 되는 것을, 좀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요. 하지만 세이지가 자꾸만 앞서 가니까… 무리를 해도 쓰려고… 저는 무섭고… 무서워서…
시즈쿠는 가족들의 걱정과 반대를 무릅쓰고 3주 동안 온 힘을 다해 완성한 소설을, 동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 같은 오래된 골동품 점에서 자신에게 마법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켜준 세이지의 할아버지에게 보여준다. 점차 어둠이 드리워지는 동안 시즈쿠는 문 밖의 난간 옆에서 무릎에 얼굴을 깊이 파묻은 채 앉아 있다. 점점 서늘해지던 바람의 온도가 시즈쿠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것처럼 날카로워졌을 때, 조심스레 나타난 할아버지의 따뜻한 말에 그녀는 눈물을 터트린다. 무서웠다고. 그때 시즈쿠가 느낀 무서움 이면의 감정은 두려움이었을까 두근거림이었을까.

두근거림과 두려움 사이. 그 사이에 놓여있을 때 청소년 시절의 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과 미래에 대한 바람은 언제나 나를 이러한 두근거림과 두려움 사이에 위치시켰다. 그럴 때마다 난 그 사이의 순간에 더 치열하게 머물고 싶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미래에 대한 바람에도 내 한계와 직면해가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러지 못한 순간이 더 많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적어도 마음만큼은 항상 그런 상태를 추구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건 마치 끝을 알 수 없이 긴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터널의 끝에 손을 내밀어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대체로 그 끝에서 난, 시즈쿠의 할아버지와 같은 누군가를 만나진 못했다. 내 치열함의 정도가 시즈쿠의 그것만큼은 아니었을 수도, 혹은 정말로 나에게 사랑을 위한 혹은 미래를 위한 재능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터널 속에서 느낀, 두려움과 두근거림 사이에서 생생하게 느낀 설명하기 어려운 그 수많은 섬세한 감정들은 내 몸 속 구석구석 아로새겨져 지금까지도 가끔씩 내 온몸을 뒤흔들며 눈물을 터트리게 만들기도 한다. 두근거림과 두려움 사이, 나는 언제까지 그 사이의 순간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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