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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선> '만선' 관람 후기
  • 작성자 박*하

    등록일 2021.09.06

    조회 379

<만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천승세 작가의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 공모 당선작이다. 그는 정식으로 극작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 점이 그 특유의 토속성과 민중지향적인 성격을 구성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만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수한 대사들과 팽팽한 긴장 관계, 뱃사람으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끔찍한 비극이 천승세 작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은 언제나 삶과 합일을 이룰 때 비로소 탄생한다고 믿는다. 내가 <만선>을 보고 한 명의 관객으로서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전율을 경험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가 <만선>을 보면서 묵직한 감동을 느끼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완벽하게 발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선>을 관람하면서 흥미롭게 봤던 장면 중 하나가 고기잡이를 떠나기 전 곰치와 도삼, 연철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도삼은 곰치에게 말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직접 돛 달고, 날씨 신경 써 가면서 어부 일을 해야 하느냐고. 서양 사람들처럼 최신 장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에 곰치는 그를 버럭 다그치며, 모름지기 뱃사람이란 중선배를 몰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딱히 이렇다 할 근거는 없고, 선조들이 늘 그리 해왔기에. 곰치가 고수하고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실상 그가 만선에 집착하는 것도 빚을 갚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 전통적 가치관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 전통적 가치관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을 때. 곰치가 느꼈을 절망감은 이루 말하기 힘들다. 때마침 무대 위에 세찬 비가 내리고, 그것은 마치 산업화 시대의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해체를 은유한 것처럼 보인다. 더 가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히 그물을 잡는 곰치의 모습.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민중의 삶은 멈출 수 없다(극중 곰치는 계속해서 "곰치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그 대사가 "곰치는 죽을 수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로 들렸다). <만선>은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 공모에 마땅히 당선될 만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관객들을 울리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민중이 처한 비극적 현실이란 별반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울적한 생각이 든다. 동시에 <만선> 같은 작품이 있어 또 우리는 힘들지만 각자의 만선을 기대하며 먼바다로 여정을 떠나는 게 아닐는지.

 

물론 우리 관객들이 <만선>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에 맞춰 새롭게 연출하고 연기한 영향이 크다. 슬슬이를 마냥 순종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과연 여성 햄릿과 파우스트를 탄생시킨 국립극단다운 선택. 지난날의 남성중심적 서사에서 벗어나 진실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연극을 지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천승세 작가가 의도한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각각의 개성에 맞게 훌륭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은 어떠한가. 배우 김명수와 정경순의 케미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여러 차례 뵌 적 있는 배우 이상홍과 송석근, 김예림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연륜이 물씬 느껴지는 김재건, 정상철, 김종칠 배우에게는 각별한 존경을 표한다. 동시대적인 연출과 연기로 무대 위를 한바탕 물바다로 만든 <만선>은 올해 관람을 놓쳐서는 안 될 명작이다.

 

끝으로, 작년 연말에 유명을 달리하신 천승세 작가를 기억한다. 본래 이 작품은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작년에 공연되어야 했을 작품으로, 잘하면 작가 본인이 새롭게 탄생한 자신의 작품을 직접 관람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군다나 그가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까마득한 선배였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더 애정이 간다. 그래도 아마 지금쯤 먼 곳에서 여기를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끝내 이루고야 만 자신의 만선을 기우뚱, 기우뚱 몰면서 말이다.

 

-instagram : @blossom_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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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

- 2021.09.03 ~ 2021.09.19

- 평일 19시 30분 / 토, 일 15시 (화 공연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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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 이상 관람가(중학생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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