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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2015)> 복수라는 이름의 정의, 복수라는 이름의 강압
  • 작성자 김*별

    등록일 2015.11.28

    조회 4491

 

 

 

 개인적으로 올해 본 연극 중에서 가장 좋았던 극입니다. 꽤 많은 연극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Best였고, 고선웅 연출 작품 중에서 생각해봐도 가장 걸작이 아닐까 싶네요. 연출 특유의 과장된 가벼움이 두드러지지 않아서 평소에 고선웅 연출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분들도 괜찮게 보실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무대와 인물의 묘사가 깔끔하면서도 세련되어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유머러스하기도 하구요.

 

 

조씨고아, 태어나면서 운명이 결정된 아이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진나라 영공 시절, 도안고라는 무관과 조순이라는 문관 두 명이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안고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자신과 다르게 입방아만 찧으면서도 황제의 신임을 얻는 조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계략을 꾸며 조순을 역적으로 몰아 그의 집안 9족을 멸하게 됩니다. 이때 조순의 며느리는 황제의 여동생이었던지라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데, 그녀는 임신중이었고 곧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었어요. 만약 아들이 태어난다면 조씨 집안의 대가 이어지게 되는 셈이니 도안고 입장에선 그가 훗날 자라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라 태어날 아이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립니다. 이 와중에 조씨 집안에 신세를 졌던 정영이라는 시골 의사 하나가 혼자 몰래 출산한 공주를 방문하게 되면서, 아이는 빼돌려지고 20년 후 복수는 예정되죠. 

 

 조씨고아가 도안고에게 '어떻게 복수하는지'가 주요 내용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조씨고아는 1막 내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1막 내내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 불과하고, 심지어 울음 한번 제대로 내지 않아요. 오히려 1막은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조씨고아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지, 또 정영과 조씨고아가 '복수'라는 대의 앞에 어떻게 떠밀려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조씨고아는 말 그대로 '선택된 아이'이자 '운명의 아이'입니다. 조씨고아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그 아이가 조씨 집안의 핏줄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쉽게 복수를 해달라 외치며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선뜻 자결을 한다는 건 현대의 눈으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기이한 면모로 보이기도 해요. 게다가 그 희생은 온전히 죄없는 한 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건 아이가 자라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희생이에요.

 

 물론 공주나 한궐이나 공손저고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긴 했어요. 그들은 아이를 살리고 자신이 죽거나 혹은 아이를 죽이고 자신이 살거나 하는,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했죠. 죄없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한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놓는 것도 있을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희생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라서 복수를 해줄 것'을 당부함으로써, 순수한 희생이 아니라 목숨을 건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조씨고아는 복수를 할 능력이 없는 아이로 자라날 수도 있었어요. 복수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조씨고아는 살릴 가치가 없는 목숨이었던 걸까요? 그 모든 희생을 저버린 몹쓸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보면서 저는 내내 그 아이가 받을 압박감을 생각했습니다. 복수에의 압박감. 복수를 할 수 있을 능력을 지니게 되어야 하는 압박감. 그들이 살려줬으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타인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로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요?

 

 

정영, 필부의 몸으로 짊어진 복수의 무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은 복수의 당사자가 되는 조씨고아가 아니라, 조씨고아를 빼낼 임무를 반강제로 맡게된 정영입니다. 정영은 도안고vs조순이라는 권력 다툼에서 철저하게 타자입니다. 9족에 해당하지도 않고, 가까스로 9족에 들어가기를 면한 친척도 아니고, 그냥 조씨 일가의 도움을 몇 번 받아 친하게 지낸 시골 의사일 뿐입니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한 조씨 집안을 가엾게 여겨, 냉궁에 홀로 유폐된 공주에게 약이나 하나 지어줄까 하고 들렀다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지점은 정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부로 남겨두었다는 점이에요. 가끔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보통 사람이, 인생의 어느 국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영은 그 대표적인 예시 같아요. 분명 정영은 평범하고 하잘것없는 필부입니다. 그게 극 중 내내 너무 잘 보여요. "오늘 공주궁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하는 그의 말은 아마 진심이었을 겁니다. "이까짓 게 무어라고!" 하면서 극 중 조씨고아를 내팽겨치려고 손을 치켜든 그 마음 역시 진심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어린 생명을 외면하지 못하고, 공주의 당부를 끊어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식이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차마 울지도 못해요. 그리고는 자기 자식을 죽인 도안고의 곁에서, 조씨고아를 자기 아들로 키우며 조용히 20년을 감내합니다. 

 

 저도 일개 필부인지라 그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되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이를 내팽겨치려는 순간 터지는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생명을 죽이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태어난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죽이다니,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자기 자식을 죽여 남의 아이를 살리다니, 동서고금에 이런 일이 어디 있느냐고 정영의 아내는 원망했지만, 조삭이 죽었고 공주가 죽었고 한궐이 죽었고 공손저고 역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눈앞에서 그 죽음들을 봐놓고는 내 자식을 살리자고 조씨고아를 내놓을 수 있을 리도 없지요. 공손저고의 말이 맞아요. 조씨고아와 함께 죽는 일은 쉬운 길입니다. 오히려 살아서 20년을 버티는 게 진정으로 어려운 길이에요. 그리고 그 말도 안되게 어려운 길을 정영은 묵묵히 혼자서 감내하면서 걸어온 겁니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말고, 부디 평안하시기를

 1막 마지막이 너무 좋았어서 2막을 걱정했는데 2막 마지막이야말로 역대급 장면이어서 감탄했습니다. 90분이었던 1막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빨려들어가서 봤는데, 오히려 70분이었던 2막이 좀 지루하게 느껴졌기에, 1막에 비해 2막이 약한 극이구나 싶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 모든 아쉬움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극이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온 160분이었고,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완성된 극이었습니다. 

 

 정영은 조씨고아를 복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청년으로 길러냈고, 출생의 비밀과 억울한 사연을 성인이 된 조씨고아에게 알려주었고, 그리하여 결국 20년에 걸친 위대한 복수를 해냈습니다. 도안고가 자신의 후계자로 길렀고, 아들로 생각했던 사람의 손에 잡혀 황제의 명으로 9족을 멸문당하게 만들죠. 하지만 복수를 끝마친 뒤 정영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은 결코 정영에게 웃어주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며, 살아나지도 않아요.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복수를 그 사람들을 대신해 해 주었건만, 20년의 세월이 무상하게도 정영의 고단함을 알아주거나 칭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지요. 정영은 혼자 남겨진 채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인 양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망령들을 그저 바라봅니다. 끝끝내 살아남은 승리자였지만 정영의 인생에 남은 게 무엇이던가요.

 

 그렇다고 해서 정영의 복수가 허망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정영과 조씨고아는 복수를 하지 않는 쪽이 나았을 것일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적어도 1막의 모든 위태위태한 과정을 함께 봐 온 관객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복수는 결국 허무할 뿐이니 포기하라"는 말을 정영에게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너무 많은 불의가 저질러졌고, 너무 많은 눈물이 흩뿌려졌어요. 자기 눈앞에서 아이 하나를 살리고자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복수를 포기할 수 있겠어요? 설령 이 복수극의 끝이 비극으로 맺어진다 할지라도, 정영 입장에서는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는 것이 허무 뿐일지라도, 억울한 목숨들이 어깨가 그득그득 쌓여있는데 자기 편하자고 "이제 됐다. 그만하자"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끝을 알더라도 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복수라는 대의명분의 무서운 점입니다. 내 꽃밭이 망가졌으니 니 꽃밭도 망가져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내가 그걸 바라지 않더라도, 죽어간 내 꽃밭의 꽃들이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덧붙이는 이야기

 사실 저는 이 극의 가장 큰 악역은 도안고가 아니라 영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모함을 걸러내는 귀만 있었어도 일은 이 정도로 크게 틀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높은 자리가 좋긴 한데 불안하다"며 도안고의 모함을 냉큼 받아들여 어느 한 집안의 9족을 순식간에 도륙해버리죠. 계획한 사람도 도안고, 실행한 사람도 도안고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결정권자는 영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진나라 시대의 이야기, 황제가 결정을 잘못 내렸다고 해서 황제를 원망할 수는 없겠죠. 그러면 역적이 되니까요. 그래서 정영도, 조씨고아도, 황제를 원망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영공이 공명정대한 척 죽어간 모든 이들의 권리를 복권시켜주고, 벼슬을 내리고, 명예를 드높여주며 이번에는 도안고의 9족을 멸문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현대의 가치관을 가진 저로서는 영공이라는 늙은이에게 정말이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말이에요. 자기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놓고, 모든 걸 도안고에게 뒤집어씌우면 다야?!!!

 

 아무래도 정영이 중심인 버전의 극이고, 그러다보니 정영 역의 하성광 배우에게 저절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전에도 다른 극에서 몇 번 좋은 인상을 받았던 배우인데 데뷔 20년만에 엄청난 극의 엄청난 배역을 맡아 엄청나게 소화를 해 버린 것 같아요~ 보잘것 없는 필부의 모습을 유지한 채 20년간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감내하고 결국에는 복수에 성공하는 정영 역에 제격이었습니다. 평범한 위대함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배우에요. 앞으로 다른 극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개인적으로  '복수'를 주제로 한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복수하는 사람이 자살한다거나, 혹은 자신이 복수하는 과정에서 만든 또다른 희생자의 손에 죽는 식으로 유사자살을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복수란 허무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매듭짓고 끝나기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뿐일지라도 복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줘서 정말 좋았습니다. 이게  옳은 일이라거나 갈 수 있는 길이라서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가야만 해서 가는 길, 울면서도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는 길인 겁니다. 그러니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말라"는 말은 마땅한 당부인 셈입니다. 이런 우환을 당하는 순간,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만 하는 길이 생기는 셈이니까요. 그리고 그 길은 정영이 걸었던 것과 똑같은 길이겠지요.

 

 

 올해 좋은 연극을 많이 봤는데, 연말에 엄청난 극이 저를 치고 가네요ㅋㅋ 개인적으로 작년에는 <죽음과 소녀>가 최고의 연극이었다면, 올해는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최고의 연극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꼭! 꼭! 막 내리기 전에 보시기 바랍니다. 1층 사이드도 괜찮고 2층 뷰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2막 처음에 나오는 두루마리 씬 같은 경우에는 2층에서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더라구요! 많은 분들이 보시고 함께 극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추천이에요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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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고아, 복수의 씨앗(2015)

- 2015.11.04 ~ 2015.11.22

- 평일 19:30 ㅣ 주말 15:00 ㅣ 화요일 공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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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13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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